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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金緻)와 심기원(沈器遠)

 

 

조선 광해군 시절 역학(易學)에 천성적인 소질을 갖춘 인재, 김치(金緻)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본다.

 

김치는 광해군(光海君)때 참판벼슬을 하던 어느 날, 자신의 사주(四柱)를 정단(正斷)해 보니 머지않아 파직할 운세이고, 대북이니 소북이니 하여 당파싸움이 심해질 것으로 판단되어, 참판벼슬을 사직하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역학의 진리에 전념을 하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또다시 자신의 사주를 면밀히 판단해 보았더니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어 인명은 재천(人命在天)이란 말과 인생 무상함을 새삼 깨달았다.

  

그 이유는 김치 자신이 47세를 전후하여 북망산천(北邙山川) 유객(幽客), 즉, 죽는다는 괘사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 괘사를 바라다보는 김치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보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생명이 다함이 아까운 것보다, 자신이 해야할 일은 너무 많은데, 그 일들을 다 못하고 '죽는구나' 라는 생각에 종이에 씌어진 자신의 사주만을 뚫어져라 하고 바라보고 있는데, 별안간 눈에 띄는 것은 수성면액(水姓免厄), 즉 성씨 중에 물 수자(水字)가 들어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죽음의 큰 액을 면할 수도 있다는 괘문(卦文)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역도(易道: 역학의 진리)에 일반적인 상식으로 시덕구제(施德救濟), 즉, 많은 덕행을 쌓아 어려운 사람을 구해주면 액을 다소나마 감소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어려움에 처해있는 불쌍한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주는 덕을 쌓아 액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하산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김치는 남의 사주를 봐주며 수양을 하던 어느 날 오후에 자신의 생명을 구해줄 수 있는 귀인(貴人)이 언제쯤 나타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할지 등을 알아보고자 주역팔괘로 정단을 해보았다.

  

그랬더니, 다음달 초승에 수성(水姓)을 가진 사람이 찾아오는 것으로 괘상(卦象)에 나타났다. 그러면서 길성(吉星)중의 하나인 천을귀인(天乙貴人)과 역시 귀인이라 할 수 있는 청룡(靑龍: 주역 괘를 판단할 때 응용한 여섯 신중 하나)이 양동(陽動, 괘가 움직였다는 것, 움직이면 힘이 배가 됨)하여 매우 길조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김치는 주역의 판단에 따라 초승이 되자. 수성(水姓)을 가진 사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특히 심(沈)씨나 지(池)씨 등, 물 수(水)자 변을 가진 사람이 찾아올 경우, 물은 음성(陰性)에 해당하기 때문에 양성(陽性)인 낮 시간보다는 음성인 저녁 무렵이나 한밤중이 될 거라고 마음 속으로 짐작하면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하루 해가 저물고 어둠이 짙어지자. 대문을 두드리며 김치를 만나볼 것을 청하는 사람이 나타나, 하인의 안내로 김치 앞에 앉아 있는 그 사람은 남루한 옷차림으로 보아 일견 농사꾼이나 장사치 등으로 착각할 수 있었으나 손마디가 매끈하고 얼굴의 생김생김으로 보아 결코 한낱 농사꾼 같지는 않았다.

  

김치의 예리한 시선을 은근히 피하는 손님은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벽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데, 흙 위에 불필요한 나뭇가지가 솟아나 그 나뭇가지를 제거하고 새로운 나무를 심어 묘목을 만들어 온 산천을 푸르게 하고 싶소. 그리고 저의 이름은 심기원(沈器遠)이라 하오." 하며 심기원은 김치에게 자신의 생년월일 등을 가르쳐주며 앞으로의 운세를 부탁했다.

 

이 말을 들은 김치는 한참동안 침묵만 지키고 있다가, 심기원의 사주를 붓으로 하얀 백지에 써놓고, "심공(沈公)이 나의 귀인이며 내가 또한 심공(沈公)의 귀인이 되오." 라고 어리둥절한 말을 했다.

  

그러자 심기원은, "선생이 저에 대한 귀인은 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어찌 선생의 귀인이 된단 말이요?" 하고 말하자. 김치는 자신이 얼마 전 판단했던 간명록(看命錄: 운명을 판단한 기록)을 보이며, 심기원이 농사꾼이나 장사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으며, 흙 위에 나무 등등 운운하는 것이나, 적혀 있는 사주로 보아 반정음모를 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설명했더니, 심기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과연 선생께서는 소문 그대로라며 큰절로 예의를 표시했다.

 

그리고는 반정음모에 가담한 김유(金 ), 이귀(李貴), 등 동료들의 생년월일을 가르쳐주며 판단해줄 것을 부탁하니, 김치는 이들의 사주를 면밀하게 살핀 후에 이 사람들은 모두가 머지않아 판서나 정승이 될 수 있는 귀격(貴格)에 해당한 사주라고 말했다.

 

이 말은 들은 심기원은 기분이 좋은지 고래를 끄덕거리면서 소매 자락에 깊이 숨겨 놓은 큼지막한 비단에 씌어진 생년월일을 가르쳐주었다.

  

새로운 백지에 심기원이 불러준 대로 사주를 뽑아놓은 김치는 깜짝 놀란 모습으로 돗자리를 깔고서 그 사주 앞에 큰절을 했다. 김치의 그 같은 모습에 심기원을 알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생각에 김치에게 지금 예를 올리고 있는 사주는 능양군(綾陽君)이고 거사 날짜는 3월 22일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러자. 김치는 다시 능양군의 사주를 정단하여 거사 날짜인 3월 22일을 집어보더니, 그 날은 지금의 왕인 광해군이 득세하는 날이라 불길하다고 하며, 능양군에게 가장 좋은 날은 3월 12일이라고 말하자. 심기원은 당황한 얼굴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근심 어린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나, 김치는 다른 날은 절대 성공할 수가 없으니 거사 날을 바꾸는 게 가장 묘책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여러 동지들과 밀회를 하여 예정했던 3월 22일 보다 열흘 앞당긴 3월 12일에 거사를 하여 성공하게 되니 능양군이 곧, 인조 임금이 되었고 광해군은 폐왕이 돼 쫓겨났다.

  

능양군이 보위에 오르자, 김치도 경상감사에 제수되어 다시 벼슬길에 올랐으나, 맨 처음 자기 운명을 정단할 때보다 수명을 3∼4년 더 연장하여 살다가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에는 "인간이 아무리 날뛰어도 천수(天壽)는 어찌할 수가 없으니 공연히 헛수고하지 말라." 는 유언을 후손에게 남기고 (仁祖 3년)떠났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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